1.
양서고는 경의중앙선 양수역과 딱 붙어 있다. 양수역 2번 출구에서 50m 거리다. 그래서 부모님이 자가용으로 데려다 주시는 게 아니면 보통 학교 출입은 경의중앙선으로 했다.
난 이 점을 꽤 좋아했는데, 교통이 편리해서만은 아니었다. 해리 포터 생각이 나서였다. 요즘 고등학생들은 뭘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으나 우리 세대에는 해리 포터 광인들이 꽤 많았다. 11살에 부엉이가 안 온 걸 보고 '아직 만 11세가 아니어서 그렇다' 며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던 사람이 우리 세대에 나 혼자만은 아니었을 거다.
해리 포터 전 권을 열 번씩은 읽었고 <아즈카반의 죄수> <죽음의 성물>은 최소 서른 번 읽었던 사람으로서, 기차를 타고 가는 기숙사 학교? 이런 낭만을 놓칠 수는 없지.
경의중앙선 타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전철의 배차간격은 3~40분 정도로 길다. 그러다 보니 귀사 시간이 되면 자연스럽게 모두 다 똑같은 전철을 타게 됐다. 그럼 이제 1-1부터 8-4까지 돌아다니며 친구가 타 있나 살펴보는 거다. <마법사의 돌>에서 헤르미온느가 급행열차 돌아다니다가 해리와 론 만나듯이.
내가 먼저 돌아다니는 게 아니더라도 앉아있다 보면 누군가가 다가와서 인사했는데, 핸드폰도 없어서 멍하니 있기만 하다가 친구를 만나면 그렇게 반가웠더랬다.
그렇지만 이 '낭만'에는 한 가지 맹점이 있다. 그건 바로 선생님들도 학교에 출입할 방법이 자가용 아니면 경의중앙선밖에 없다는 것. 리무스 루핀도 <아즈카반의 죄수>에서 급행열차 타고 호그와트 입성했으니까 어쩌면 이것도 낭만일지 모른다.
양서고 재학생이 이 글을 본다면 부디 덕소역과 구리역을 조심하시길. 담임선생님께 아파서 병원 간다고 외출신청하고 구리에서 곱창 먹다가 담임선생님께 "여기가 병원이냐?" 를 들을 수 있다. 고기야말로 이 세상 최고의 약이긴 하지만.
또, 퇴사 당할 일도 가급적 하지 마시길. 선생님과 매일 같이 등교하게 된다. 기숙사내 전자기기 반입으로 퇴사 당해 한 달간 광명시에서 등하교한 친구가 있었는데, 경의중앙선에서 졸다가 깨면 항상 H 선생님과 C 선생님이 불쌍해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계셨다고 한다.
2.
아직도 지하철 노선도에 민트색 경의중앙선을 보면 양서고 생각이 난다. 나만의 민트색 양서고 급행열차.
비록 잡상인도 많고, 배차간격도 길고, 매번 같은 선로를 쓰는 무궁화호, ITX, KTX에 길 다 양보해주느라 한여름이건 한겨울이건 문 열어놓고 10분씩 대기하다가 결국에는 지연되는 게 일상이며, 주말이면 양수리 관광하러 온 사람들로 미어터지지만, 그래도 애틋하다. 그 시절엔 용산-용문이었는데 언제 문산-지평이 됐니.
수능이 끝난 이후로 경의중앙선 타고 양수리에 갈 일이 생기면 매번 운길산-양수역 구간에서 북한강을 바라보며 박보람의 혜화동을 듣는다.
덜컹거리는 전철을 타고 찾아가는 그 길
우린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살아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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