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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서고 이야기

양서고 이야기 1. 은어_타임

 여느 고립된 집단답게 양서고에는 여러 은어가 있었다.

 

1.

 우리는 생활 시간표에 정해져 있는 야간 자율학습 시간을 타임이라고 불렀다. 누가 이렇게 부르기 시작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입학하기 한참 전부터 타임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보통 동사 뛰다를 붙여 썼다. 앉아서 가만히 공부만 하는데 왜 타임을 뛴다고 말하는 건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여튼간 그렇게 썼다.

 

 타임은 기본적으로 1타임, 2타임으로 나뉜다. 7시부터 910분까지가 1타임, 930분부터 1130분까지가 2타임인가 그랬다. 남학생과 여학생 독서실의 쉬는 시간이 20분 차이가 났는데, 연애하지 말라는 이유에서였다.

 

출처: 양서고등학교 홈페이지 (2024ver. 내가 다니던 때와 시간이 살짝 달라졌다. 세상에 더 독해졌네...)

 

 정규 타임 시간이 1타임, 2타임이었고 그 외의 자율학습 시간이 생기면 그건 0, 아타, 새타 등으로 변주해서 불렀다. 저녁 시간 전에 자습할 시간이 생기는 건 1, 2타임 전에 한다고 해서 0, 아침 등교 전에 독서실 가서 공부하다 가면 아침타임이라고 해서 아타, 밤 점호 뒤에 새벽 130분까지 공부하다 자면 새벽타임이라고 해서 새타.

 

 이외에 화타, 방타라는 말도 있었다. 각각 기숙사 화장실에서 뛰는 타임, 기숙사 방에서 뛰는 타임을 의미한다. 새벽 130분 이후로는 독서실이 잠기기 때문에 그 이후에도 공부하고 싶으면 기숙사에 가서 해야 했다. 방에서 공부하는 건 그렇다손 쳐도 왜 하필 화장실에서 공부했냐면, 12시 이후 기숙사 모든 방은 반드시 소등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방 중앙 전등을 켜두면 방문 틈새로 빛이 비쳐서 사감선생님들이 그걸 보고 벌점을 주시곤 했다. 그러다 보니 책을 읽으려면 합법적으로 불을 켤 수 있는 화장실에 들어가거나 방에서 몰래 손전등을 켜는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이런 말들이 만들어졌다.

 

 

2.

 화타, 방타는 한 자라도 더 읽고 외워야 하는 시험기간에 특히 성행했다. 이것 때문에 여기숙사에서는 룸메이트끼리 갈등을 빚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남기숙사는 공용화장실을 쓰니 내 공부가 룸메이트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지만, 여기숙사는 화장실이 방 안에 있어서 문을 여닫을 때 불빛에 룸메이트가 깨곤 했던 것이다. 시험기간에 푹 자야 점수가 잘 나오는 학생들의 경우 단잠을 방해하는 친구가 얄미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화타, 방타는 보통은 갈등의 온상이었지만, 룸메이트들이 전부 동참하면 이게 또 웃기게도 추억이 됐다. 나는 아직도 고3 1학기 시험기간에 룸메이트들과 다 같이 뛰던 화타, 방타가 (미화돼서)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문밖으로 새어 나가는 불빛 가린답시고 담요로 배리어 쳐 두고. 거의 뭐 전쟁 피난민 몰골로 손전등 켜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생2 분류 따위를 외웠다. 밤새우면 배고프니까 가운데 과자 까 두고 다 같이 집어먹으면서. 그렇게 공부하다가 2명은 미리 잠들었고, 둘의 수면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1명은 화장실에, 3명은 샤워실에 들어갔다. 1.5제곱미터나 될까 싶은 샤워실에 3명이 들어가서 축축한 바닥에 수건 깔고 공부하는데, 엉덩이는 점점 젖어 오고 어깨엔 뚝뚝 물이 떨어졌다. 아직도 고3 룸메이트들 만나면 이때 이야기를 하곤 한다. 돌이켜보면 그때 우리 꼬라지 정말 처량하고 웃겼다며.

 

 

3.

 타임을 세간의 어휘로 치환해 보면 야자와 같은데, 3년간 타임이라는 말만 주구장창 쓰다 보니 야자라는 말은 영 입에 붙지 않는다. 그래서 졸업 후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이 야자라는 단어를 쓰면 그게 그렇게 어색했다. “야자 진짜 갑갑했어.” “야자 째고 놀러갔었는데.” 이런 말을 들으면 매번 빨간줄 긋고 타임이라고 바꾸고 싶었다. 야자가 뭐야 야자가, 타임이지.

 

 양서고에는 여러 은어가 있고 앞으로 1-2개의 글로 그에 대해 더 설명할 테지만, 양서고 은어들 중 가장 독특하고 specific 했던 은어는 역시 타임과 다음 글에 쓸 ‘JP’였다고 본다.